
같은 부모를 부양하는데도 누군가는 받고, 누군가는 받지 못했다. 차이는 '장남'과 '성별'이었다.
부모를 실제로 돌보고 생활비를 부담해도 가족수당을 받을 수 없는 직원이 있었다. 반면 부모와 함께 살지 않아도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수당을 받는 직원도 있었다.
같은 복지제도 안에서 지급 기준이 달랐던 이유는 업무 성과도, 근속연수도 아니었다. 장남 여부와 성별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러한 가족수당 지급기준이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이라고 판단하고 해당 병원에 관련 규정을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
이번 결정은 한 병원의 내부 규정을 넘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오래된 복지기준이 오늘날의 현실과 평등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다시 묻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장남은 주소가 달라도 지급… 여성은 부모를 모셔도 조건이 달랐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해당 병원은 가족수당을 지급하면서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
남성 직원이 장남이거나 여성 직원의 배우자가 장남인 경우에는 부모와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달라도 가족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여성 직원은 자신의 친부모를 실제로 부양하더라도 부모와 주민등록상 같은 주소에 거주해야만 가족수당 지급 대상이 됐다.
결국 부모를 실제로 부양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장남 여부와 성별이 지급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한 셈이다.
이를 부당하다고 판단한 직원은 올해 2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고, 인권위는 해당 규정이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인권위 "가족수당은 장남에게 주는 돈이 아니다"
인권위는 가족수당의 본래 목적이 가족을 실제로 부양하는 직원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지급 기준 역시 장남인지 아닌지, 남성인지 여성인지가 아니라 실제 부양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장남에게는 부모와 떨어져 살아도 가족수당을 지급하면서 여성 직원에게는 더 엄격한 조건을 적용한 것은 평등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이러한 규정이 장남이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족관과 성 역할 고정관념을 제도에 그대로 반영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오래된 규정"은 차별의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병원 측은 해당 규정이 과거 공무원 보수체계를 참고해 마련됐으며, 이후 노동조합과의 단체협약과 취업규칙 등의 이유로 유지돼 왔다고 설명했다.
또 여러 차례 규정 개정을 추진했지만 노사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변경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인권위는 오래된 규정이라는 사실만으로 차별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공무원 가족수당 제도는 장남 중심 기준을 이미 폐지했지만 해당 병원은 1993년 제정된 기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실은 바뀌었지만 규정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이번 결정이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특정 병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부모를 부양하는 가족 형태는 과거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장남이 부모를 모시는 경우도 있지만 딸이 부모를 돌보거나 맞벌이 부부가 함께 양가 부모를 부양하는 사례도 흔하다.
그럼에도 복지제도가 특정 성별이나 출생순서를 전제로 운영된다면 현실과 제도 사이의 괴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가족수당은 누구의 성별이나 출생순서를 보상하는 제도가 아니라 실제 부양 부담을 고려하는 복지제도라는 점을
이번 결정은 다시 확인했다.
이번 결정이 던진 질문은 하나다
이번 권고는 단순히 한 병원의 규정을 고치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과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를 포함해 다양한 조직이 운영하는 복지규정 역시 지금의 평등 원칙에 맞는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규정은 오랫동안 유지됐다는 이유만으로 정당성을 갖지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 제도 역시 현실을 반영해 바뀌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예전부터 그랬다"는 말이 더 이상 차별을 설명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